국립대 총장들 제안, 정부가 ‘수용’…대학이 증원분 50~100% 자율 모집
‘2천명 증원’ 원칙은 지켰지만 “집단행동에 굴복하고 ‘백기'” 비판도
대화 명분쌓기 의도도…정부, 의료계 반대에도 증원 강행 수순 밟을 듯
정부가 일부 국립대 총장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2025학년도 의대 증원분을 각 대학이 50~100%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결정함에 따라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탄력이 붙을지 주목된다.
배경에는 ‘2천명 증원’이라는 큰 틀을 바꾸지 않는 명분을 취하면서도 대학이 일정 부분 증원분을 줄일 수 있도록 하는 실리를 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는 여전히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번 결정을 계기로 다음달 말 최종 확정되는 의대 증원을 밀어붙일 것으로 보인다.
◇ 6개 국립대 총장 “증원 50~100% 자율적 결정하게 해달라”…정부, 전격 수용
21일 정부와 대학들, 의료계 등에 따르면 강원대, 경북대, 경상국립대, 충남대, 충북대, 제주대 등 6개 국립대 총장은 지난 18일 건의문을 내고 “2025학년도 대학입학전형의 경우, 대학별로 자체 여건을 고려해 증원된 의과대학 정원의 50%에서 100% 범위 내에서 자율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건의한다”고 밝혔다.
‘2천명 증원’을 계획대로 추진하되, 대학들이 증원분을 최대 절반까지 줄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총장들은 이런 제안의 배경에 대해 “2025학년도 대입 전형 일정과 관련해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다음날인 19일 이런 제안과 관련을 수용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한 총리는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후 직접 브리핑을 하며 “건의를 전향적으로 수용하겠다. 의대생을 적극 보호하고, 의대 교육이 정상화돼 의료현장의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실마리를 마련하고자 결단했다”고 밝혔다.
대학에 자율성을 주긴 하지만 정부는 ‘2025학년도 입시에 대해서만 이런 원칙을 적용하고 2천명 증원’ 계획 자체는 변함 없이 추진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내년 의대 증원 규모는 최대 1천명까지 줄어들 수 있다. 같은 원칙은 이런 제안을 한 국립대 외에 증원 대상 모든 의대에 해당한다.
이런 정부의 계획에 대해 의료계는 일제히 ‘수용 불가’의 목소리를 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차기 회장 당선인은 “(이런) 제안만으로는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반대했고,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관계자는 “백지화 상태에서 정원에 대해 논의하자는 입장은 처음과 같다”고 말했다.
전공의들 역시 “우리 여론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정근영 전 분당차병원 전공의 대표), “큰 변화도 아니고, 기만 같다”(익명의 전공의)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 “‘2천명 증원’ 불변” 강조하지만 “원칙 깼다” 비판도
정부가 국립대 총장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당초 공표했던 ‘2천명 증원’의 원칙은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대학과 의료계에는 올해 증원분을 조정할 여지를 주며 숨통을 트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2월6일 ‘2천명 의대 증원’을 발표한 뒤 증원 규모를 축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의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최근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 의료계와 일부 정치권에서 증원 규모를 조정하라고 압박을 받고 있지만, 입장을 바꿔 증원을 철회하거나 규모를 줄이면 향후 국정 운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각 대학이 증원분의 50~100%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면 대학들은 증원 규모를 절반까지 줄여 의대 교수들의 반발을 다독일 수 있게 된다.
각 대학들은 정부에 큰 폭의 의대 증원을 신청했었는데, 이에 의대 교수들은 의대와 상의없이 추진됐다며 강하게 반발했었다.
정부로서는 대규모 증원에 따른 의학교육 부실화 우려를 덜 수도 있다. ‘2천명 증원’ 발표에 대해 의료계는 교수와 교육 공간 확보가 어렵다며 의학교육의 질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했었다.
한 정부 관계자는 “‘2천명이라는 증원 규모는 변하지 않았다. (대학에 증원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한) ‘현장에서의 자율성’은 지금 정부의 국정철학과 같은 방향이기도 하다”며 “‘증원 규모에 대한 흥정은 없다’는 원칙을 지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결정과 관련해서는 스스로 밝혔던 원칙을 깨고 의료계의 저항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19일 논평에서 “흔들림 없다던 정부가 스스로 원칙을 깨고 결정을 번복한 것”이라며 “국립대 총장들의 건의를 전향적으로 수용했다지만, 정부가 의료계 집단행동에 다시 굴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대) 모집인원 확정을 앞두고 돌연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를 빌미로 기존의 원칙과 결정을 번복한 채 백기를 든 것”이라며 “의료계의 요구가 완전히 관철될 때까지 더 크게 저항할 빌미를 제공해준 셈”이라고 비판했다.
◇ 의료계는 “증원 백지화” 반복…정부, 증원 강행 수순 밟을 듯
정부는 이번 조치 후 의대 증원 강행 추진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계속해서 통일된 안을 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의료계는 “증원 원점 재검토”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정부는 ‘과학적 근거에 의한 의료계의 통일된 안이 나오면 열어놓고 논의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강조하면서 다음달 말 2025학년도 입시 대학별 정원이 확정될 때까지 증원을 계속 추진할 방침이다.
각 대학이 내년도 대입전형 시행계획을 확정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 제출하는 시한은 이달 말까지다. 대교협이 이를 승인하면 각 대학은 다음 달 말까지 홈페이지 등에 모집요강을 공고하고, 내년도 입시의 대학별 의대 정원이 최종 확정된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대학에 일부 자율권을 주면서 증원분 축소 여지를 둔 것이 이탈 전공의에 대한 강경책 전환을 앞둔 명분 쌓기라는 시각도 있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오랫동안 전공의에 대한 처분을 중단하고 의료계에 대화를 요구하고 있고 대통령이 전공의 대표까지 만나기도 했다”며 “정부가 대학의 의견까지 받아들여 정원 결정에 여유를 준 만큼 증원을 계속 추진할 명분이 커진 셈”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달 25일부터 전공의에 대한 ‘기계적 처벌’ 방침을 유예하고, ‘유연한 대처’를 강조하고 있다.
업무개시(복귀)명령을 어긴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행정처분 절차 진행을 유보하고 있지만 의료계의 대화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다시 기계적 처벌로 방향을 선회할 수 있다.
정부는 실제로 전공의 처벌 외에도 전공의 복귀를 유도할 여러 조치를 검토하는 한편, 의협에 대해서는 고강도 감사 등으로 압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9일 브리핑에서 “(여)당의 건의에 따라 전공의에 대한 처분에 대해 유연하게 접근하고 있다”면서도 “향후 의료계와의 협의 과정 등 상황 변화를 고려해 처분 절차 재개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