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들의 금과옥조가 하나 있다. 새내기 때 귀에 못이 박히게 훈계를 들었다. 누구나 아는 ‘5W-1H’ 따위가 아니다. “기사를 간결하게 쓰라”는 것이다. 내 딴엔 멋지게 써낸 기사가 데스크(부장)를 거쳐 신문에 게재돼 나온 걸 보면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기 일쑤였다. 군더더기를 빼고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형용사와 부사를 가능한 한 줄이라는 주문이었다.
그 후 20년이 훨씬 지난 중견기자 시절에 이번엔 ‘하늘같은’ 선배가 “기사를 섹시하게 쓰라”고 다그쳤다. 나는 얼른 말귀를 알아차렸지만 새내기들은 어리둥절했다. 음담패설을 쓰라는 거냐고 묻는 후배도 있었다. 펑퍼짐하지 않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여자의 몸매가 섹시해 보이듯이 글도 간결하고 균형이 잡혀야 맛깔스럽다는 설명이었다.
그 대선배 기자가 바로 이경원(KW Lee)씨였다.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서 은퇴한 그분을 한국일보 미주본사가 1990년 고문으로 영입했고, 당시 한국일보 미주판의 한 페이지짜리 ‘부록’이었던 영문판을 얼마 후 주간지로 확장해 그를 편집장으로 위촉했다. 영문판 창간을 돕기 위해 서울본사에서 파견 나와 있던 내가 선배님을 만난 건 기대 못했던 큰 행운이었다.
그가 1970년대에 쓴 120여 꼭지의 ‘이철수 사건’ 기사는 지금 읽어봐도 섹시하다. 이철수가 중국인 갱 두목을 살해했다는 건 누명이고 그가 교도소에서 동료 수감자를 죽인 건 정당방위임을 입증한 논지가 명쾌하다. 그는 재판에 관여한 판사·검사·경찰관·배심원·관선변호사 등을 일일이 인터뷰한 후 이들이 한결같이 이철수를 중국인으로 알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는 “내 혈관엔 잉크가 흐른다”고 농담했다. 자신의 기자 근성을 빗댄 말이지만 본래 기자가 꿈은 아니었다. 그는 고려대 재학 중이던 22세 때(1950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을 거쳐 명문 일리노이 대학에서 1955년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에 신문학과를 창설하고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귀국을 앞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던 몬테레이 헤럴드지로부터 한국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관한 글을 청탁받은 게 화근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81세 고령에 종신집권을 노리며 3선 출마를 강행한다”고 호되게 깠다. 그의 기고는 곧바로 경무대에 입수됐고 뿔이 난 프란체스카 여사는 상항(SF)총영사관에 압력을 넣어 그의 유학생 여권을 당장 취소시켜버렸다.
졸지에 불법체류자가 된 그는 강제추방을 피하려고 전국 신문사 수십 곳에 구직원서를 뿌렸다. 이윽고 테네시주 동부 시골의 킹스포트 타임스-뉴스지에 가까스로 취직했고 얼마 후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찰스턴 가제트지에 인권 전문기자로 스카웃 됐다. 그는 당시 대형병원 응급실의 부조리를 캐내려고 끈질기게 찾아가 인터뷰했던 간호사 페기 플라워와 결혼했다.
그는 조사보도라는 장르가 생기기 전부터 그 길을 닦았다. ‘자유영혼상’과 아시안 언론인협회(AAJA)의 첫 평생업적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한미기자협회(KAJA) 창립회장이다. 한인이민 100년사의 ‘10대 위인’에 선정됐다. LA 폭동을 한인 시각에서 ‘Saigu(4·29) Riot’으로 고집스레 표기했다. 2세 지도자 양성을 위해 2003년 ‘KW Lee 리더십 센터’도 창설했다.
‘한인 언론의 대부’로 추앙받는 그 선배님이 8일 96세로 영면했다. 영문판에 인턴을 시켰던 내 아들과, 본인이 개설하려던 고대 신방과를 나온 내 아내의 안부를 기회 때마다 물었다. 바쁠 땐 구내식당에서 감자를 구워 점심을 때웠다.
이식받은 간이 흑인 것 같다며 “나는 인종통합을 몸으로 실천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섹시한 글을 후배들이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됐다. 그보다도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핍박 정책이 날로 강화되고 있는 때에 한인들의 목소리를 앞장서 외쳐온 선구자가 스러졌다. 전체 한인사회의 큰 손실이다.
<윤여춘 전 시애틀지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