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원변호사의 H법정스토리
요즘,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세대에서는 ‘졸혼’이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화두로 오르곤 합니다. 졸혼이란 결혼을 졸업하다의 준말인데, 2000년대 초반에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졸혼시대’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처음으로 졸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합니다.
김씨 부부 사례입니다. 김씨 아저씨,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상사 잔소리에, 이리저리 눈치보며 10시간 이상의 사투가 끝나면, 퇴근 후 그냥 집에 가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전해서, 매일 돼지 껍데기, 곱창 집에서 소주 잔을 부딪히고, 갈지자 걸음으로 혼자 노래를 불러대며 집을 찾아가던 세월이 어언 3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아뿔싸, 직장에서 드디어 말만 화려한 명예 은퇴, 즉 강제 퇴사를 당했습니다. 평생 마누라 하고 얼굴 맞대고 저녁 먹어본 일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매 끼니마다, 마누라 눈치 보며 숟가락 들기가, 이게 내 집인지, 남의 집에 얹혀 사는 것인지,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줌마는, 젊어서는 남편의 빈 자리를 자식들로 메우다, 자식들 다 떠나가고 불현듯 찾아온 외로움, 우울증과 피 터지게 싸우다, 이제 겨우, 줌바 댄스, 노래 교실, 이리저리 마실 다니고, 철 따라 여행도 다니며, 인생 황금기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삼식이 남편을 하루 종일 마주 대하려니 죽을 맛입니다.
매일 눈뜨고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아저씨 뒤통수만 봐도 짜증이 나고, 하는 짓마다 미워 보이고, 트집에, 잔소리에, 목청 터지게 소리 지르다, 결국엔 문이 부서져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 아줌마의 새로운 일과입니다.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평생 혼자 벌어서 마누라,자식들 먹여 살리고, 내 집도 마련했는데, 이제와 어디서 주어온 의붓자식 취급하며 먹는 것까지 구박을 하니,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 잔 마시고 조용히, 정처 없이 집을 나서곤 합니다.
이렇게 외로움이 뼈 속까지 시리던 아저씨, 아저씨 얘기 들어주며, 나긋 나긋, 호호호 웃어주는 여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저녁이면 집에 들어가, 호랑이 마누라 눈치 보며 여자친구와 낮에 못 다한 얘기, 카톡 하기 바쁩니다. 아저씨 주머니 속에서 ‘카톡, 카톡’ 연이어 울려 대고, 아저씨 헛기침하면서 방으로 가는 이 사태를, 눈치 백단 아줌마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일어나서 여지없이 서둘러 나가려는 아저씨를 불러 세우고, 아줌마가 얘기 좀 하자 합니다. 아저씨, 본능적으로 ‘올 게 왔구나’, 숨이 콱 막혀옵니다. 자, 여기서 아줌마, 아저씨 앞에 물 한잔 갖다 놓으며, 악 쓰는 대신, 조용 조용 말문을 열어갑니다.
‘평생 서로 제대로 감정 통해본 적 없고, 우리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여기까지 꾸역꾸역 버티고 살아온 것도 기적이야.나도, 당신도 참 무던히 애썼어. 그런 당신에게 매일 소리 질러 대는 내 자신이, 나도 내가 싫어.그렇다고 이제 와서 우리가 달라지긴 그른 거 같고. 남은 인생, 서로 잘 살아야지. 우리 마음 편히 각자 생활하며 각자 인생 삽시다.
그렇다고, 아이들, 손주까지 있는데, 법원 드나들며 이혼까지 하는 건, 아이들 가슴에 못 박는 것 같아서 못하겠고. 우리, 테레비에 나오는 ‘졸혼’합시다. 따로 살면서, 그저 가끔 씩, 자식, 손주 들이 부르면, 다 같이 엮여서 웃는 얼굴로 그렇게 봅시다.’
아저씨, 처음엔 악쓰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는 아줌마를 보고, ‘눈치는 챈 것 같은데, 웬일이래? 그럼 이제 마음 편히 여친을 만나도 되는 거야?’ 라는 안도감이 들다가, 아줌마 이어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점점 고개가 숙여지고,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가슴에 밀려오는 후회인지, 회한인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안스러움 인지, 급기야 콧물이 줄기가 되어 흐릅니다.
젊어서 만나 결혼하고, 함께 부모가 되고, 삶의 시련속에서,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는 있지만, 서로 간에 느끼는 외로움과 갈등의 골은 살수록 깊어만 가고. 이렇게 한 집에서 남남으로 사는 부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졸혼을, 황혼에 접어든 부부 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이상적인 대안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막상 졸혼도 외로운 길 아닐까요? 부부는, 가정은,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물과 햇빛을 주어야, 말라 비틀어 죽지 않고 그 뿌리가 버틸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나무는 어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