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주한미군 갈등·김일성 면담…카터 전대통령 한반도 인연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로이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권·주한미군 철수 갈등… ‘신군부 묵인’ 논란

DJ 구명 앞장서기도…1차 북핵위기서 김일성 만나, 총 3차례 방북

29일 100세의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생전에 한반도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1977∼1981)에는 대선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씨름했다.

‘현직일 때보다 전직일 때가 더 아름다웠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국제분쟁의 해결사로 지구촌 곳곳을 누볐던 퇴임 후에는 ‘한반도 위기 해결사’를 자임, 세 차례 방북하는 등 한반도 평화정착과 북핵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헌신했다.

‘존경받는 전임 대통령’으로서 이름을 날리며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그에게 한반도라는 공간은 아주 의미 깊은 활동무대였다.

◇ 주한미군 철수 공약…’혈맹’ 한미동맹의 최대 위기 봉착

카터 전 대통령은 1976년 6월 23일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 철수론을 꺼내 든 것이었다.

그 여파로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혈맹’으로 발전한 한미동맹은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미군 수뇌부에서는 즉각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나왔지만,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소신을 접지 않았다. 당시 ‘코리아 게이트’ 파문으로 미국 의회 내에 반한(反韓) 기류가 팽배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론은 더욱 힘을 받는 분위기였다.

북한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정보기관들의 평가보고서도 한몫했다.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같은 해 3월 주한미군을 4∼5년 안에 단계적으로 철군시키고 전술핵무기까지 철수한다는 세부 계획까지 제시했다.

당시 존 싱글러브 미 8군 참모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면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라고 말하며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했다가 곧바로 카터 대통령에게 소환돼 좌천되는 일까지 빚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상황을 문제 삼는 카터 행정부를 향해 “내정간섭을 중단하라”며 극도의 불신과 배신감을 표출했다.

이런 가운데 카터 전 대통령의 첫 방한 기간인 1979년 6월 29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선 주한 미군 철수 문제 등을 놓고 한미 정상간 정면충돌이 빚어지면서 양국 정상회담 역사 사상 ‘최악’이라는 오명을 안았다.

2018년 11월 공개된 백악관 외교 기밀문서에 포함된 당시 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단독 정상회담 자리에서 주한미군 철수 및 한국의 인권 상황을 놓고 격한 설전을 주고받았다.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어떤 식으로든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카터 전 대통령과 북한이 군사적 우위를 보이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핵심전력을 섣불리 빼서는 안 된다는 박 전 대통령의 논쟁은 살얼음판 같았던 당시 한미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꼽힌다.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이 국민총생산(GNP)의 20%가량을 군사비에 쓰고 있다”며 한국의 방위비 확충을 압박하자, 박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에 대해 소신을 밝히면서도 “북한은 우리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GNP의 20%를 군사비에 쓰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맞받아치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처럼 박 전 대통령이 북한의 군사력 증강과 오판을 부를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우며 30분간에 걸쳐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지적하자, 카터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규모가 전체 한국군의 0.5% 수준에 불과하다면서 한국이 군사비를 자체 확충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면서 당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핵무장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나아가 긴급조치 9호 해제 등 인권문제까지 거론하며 박 전 대통령과 두시간 반 동안이나 격론을 벌였다.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전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박 대통령이 첫 번째 의제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자 회담장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며 “나는 카터 대통령이 분노를 억누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카터는 당시 격앙된 나머지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겠다고까지 했으나 측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8년 3월 펴낸 회고록 ‘지미 카터’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당시 회담에 대해 “그동안 내가 우리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소위 ‘암스트롱 보고서’가 나오면서 미국 의회의 기류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우군인 민주당 내에서조차 반대론이 고개를 들었고 이를 의식한 카터 행정부는 결국 철군 계획을 보류했다.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정부를 향해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지속해서 압박했으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신군부의 집권을 사실상 ‘묵인’해주는 등 애매한 입장을 취한 것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집권을 용인한 것은 ‘인권 외교’와 모순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1차 북핵 위기 이후 첫 방북…한반도 ‘평화의 전도사’로 나서

카터 전 대통령과 한반도의 인연은 재임 때보다 퇴임 이후 더욱 조명을 받았다.

그는 80년대 초 신군부 치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나서는 등 한국내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퇴임 후에도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그의 시선은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 구도와 긴장을 이완하고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카터 전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북핵 1차 위기가 극에 달했던 1993년 6월이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한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미국의 영변 폭격설까지 대두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때 ‘평화의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북한 김일성 국가주석과 북핵 문제에 대한 담판을 짓겠다며 빌 클린턴 행정부에 방북 승인을 요청했고, 방북이 성사됨으로써 그는 김 주석과 처음으로 대좌했다.

이에 앞서 김 주석은 지난 1976년 카터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 직후 파키스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통해 ‘북미 직접 대화’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사실이 훗날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의 관련 전문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 주석의 대화 요청 서한이 전달된 뒤 17년만에 전직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김 주석을 만나게 된 셈이다.

1차 북핵 위기 당시 대북제재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카터 방북에 대해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터의 방북이 모처럼 조성된 국제사회의 대북 공조 체제를 흔들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한반도 북핵 위기 타개를 명분으로 내세운 카터 전 대통령의 집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6월15일부터 3박 4일간 평양을 방문해 김 주석과 두 차례 면담했고 그 결과를 곧바로 CNN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김 주석과 합의한 내용은 ▲ 3단계 북미회담을 재개한 뒤 영변 핵시설에서 무단 인출한 핵연료봉의 재처리를 유보하고 ▲ 경수로를 제공할 경우 흑연감속로를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을 떠나 서울을 방문하면서 당시 북미가 북핵 위기 국면을 주도하면서 외교적 고립감을 느끼던 한국의 김영삼 정부에게도 뜻밖의 선물을 안겨줬다.

김 주석은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달해 사상 최초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카터 전 대통령은 서울 기자회견에선 북한이 핵 활동 동결 및 IAEA 사찰관 잔류 허용과 함께 남북 정상회담에 동의했다고 밝혔고, 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환영 입장을 표명하며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카터 전 대통령의 당시 ‘깜짝 행보’를 놓고는 엇갈린 평가가 나왔다.

일단 전쟁 위기로 내달리던 북·미 간의 긴박한 대결국면을 해소하고 한·미 양국 정부가 다시금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분위기를 조성시켰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으로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압박 행보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돌출행동’을 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이에 따라 당시 궁지에 몰려있던 북한으로서는 실질적 핵 포기 조처를 하지 않은 채 카터를 이용한 유화 공세를 통해 효과적으로 국면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카터를 한반도 외교의 ‘불청객’으로 보는 시각이 미국 행정부 당국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 북한 억류 미국인 석방 협상…북미정상회담 ‘훈수’로 평화 기여

1차 방북을 통해 북미 협상의 물꼬를 텄던 카터 전 대통령이 다시 한반도 문제에서 존재감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16년 후인 2010년 8월이었다.

당시 8년의 노동교화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아이잘론 말리 곰즈씨의 석방을 위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승인을 얻고 평양을 방문한 것이었다. 석방 교섭 차원을 넘어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하겠다는 카터 전 대통령의 개인적 동기가 컸다.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곰즈씨의 사면을 끌어내며 그와 함께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이 당초 기대했던 극적인 반전 드라마가 연출되지는 않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8월25일부터 사흘간 방북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으로 외유를 떠나는 바람에 당초 가능성이 점쳐졌던 ‘카터-김정일 면담’은 불발됐다. 전례 없는 모욕을 당했다는 미 언론의 평가 속에 카터 전 대통령은 예정했던 기자회견도 취소하는 등 곰즈 씨 석방 성과도 빛이 바래고 말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천안함 폭침 이듬해이기도 한 2011년 4월 ‘디 엘더스'(The Elders)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으나, 이번에도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은 이때도 이뤄지지 못했다. 이와 함께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담은 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했지만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어 카터 전 대통령은 2017년 공화당 소속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국가 원로로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역할론을 마다하지 않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군사옵션이 공공연하게 거론될 정도로 북미 간 긴장 고조로 전쟁 위기론까지 제기되던 2017년 10월에는 워싱턴포스트(WP)에 글을 기고, 한반도 내 ‘제2의 전쟁’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평화 협상을 위한 고위급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는 특히 이 무렵 “엄중한 한반도 상황을 푸는 역할을 다시 원한다”며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게도 두어 차례 방북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다. 알아서 하겠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 2018년 5월,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북한과 미국 양쪽 다 수용할 만한 평화협정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면서 “전임 대통령들은 실현하지 못했던, 가치 있고 중대한 업적이 될 것”이라고 훈수했다.

이어 2018년 12월에는 미중 관계와 관련한 WP 기고에서 “다른 이슈들에 대한 (미중 간) 긴장 관계에도, 중국의 지원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반도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보려는 카터 전 대통령의 관심과 열정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고, 일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그는 이런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외교적 활동 이외에 국제 봉사 활동 차원에서도 한국에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지난 2001년 8월에 한국을 방문,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참가해 자원봉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한편, 카터 전 대통령이 설립한 카터센터는 지난 2014년 12월엔 내란음모·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구명을 위해 대법원에 성명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성명서는 유죄판결이 군사독재 시절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에 의해 선고됐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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