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방첩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 후신)가 이미 지난해 11월 장성 인사 때부터 ‘용현파’에 의해 장악된 것으로 판단할 만한 정황이 확인됐다. 이후에도 용현파의 ‘나들목’ 역할을 하며 계엄준비 및 사후 분위기 조성에까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용현파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계엄을 건의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육사 38기)과 그의 육사 후배들을 일컫는다. 윤 대통령의 충암고 인맥을 뜻하는 ‘충암파’와 함께 이번 계엄 사태의 핵심으로 꼽힌다.
방첩사는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에서 △사전 계획 문건 검토 △포고령 작성 △주요 정치인 신병 확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시설 확보 등 핵심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군 주요 직위 인사를 쥐락펴락한 김 전 장관과 그의 측근들이 무려 1년 전부터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계엄을 준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방첩사 핵심 3명 모두 전례 없이 외부 인사로
8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용현파의 방첩사 장악은 2023년 11월 6일 단행된 장성 인사 때 두드러졌다. 사령관에 여인형(48기) 중장, 참모장에 소형기(50기) 소장, 기획관리실장에 김철진(54기) 준장을 진급시켜 방첩사 지휘부에 앉혔다. 방첩사 3개 핵심 보직이 모두 외부에서 채워진 전례는 없다고 한다. 당시 조직 내에서도 의외라는 평가가 나왔다.
여 전 사령관과 소 전 참모장은 인사 발령 이전에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에서 부장과 계획편제차장으로 손발을 맞췄다. 김 전 장관이 충암파인 여 전 사령관, 그와 육사 선후배이자 근무연으로 엮인 소 전 참모장을 앞세워 방첩사를 접수하고 계엄을 사전에 모의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방첩사는 계엄이 실행되면 합동수사본부를 지휘하며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12·12 군사 쿠데타를 주동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현 방첩사령관과 같은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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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기 육군사관학교장.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캡처
여인형·소형기 ‘근무연’… ‘용현파’ 김철진, 방첩사 파견 후 장관 보좌관으로
김철진 전 실장은 장관 보좌관실에서 실무자, 총괄장교, 과장을 거치며 장관 비서 전문과정을 밟아온 인물이다. 이종섭 전 장관 시절 보좌관을 지냈고, 신원식 전 장관 때 방첩사로 옮긴 뒤 불법 계엄 발령 일주일 전인 지난달 26일 단행된 장성 인사에서 김 전 장관의 보좌관으로 국방부에 복귀했다. 방첩사와 국방부 장관의 소통 창구로 ‘파견’됐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군 소식통은 “김 전 장관이 여 전 사령관 임명 때 측근인 김 전 실장을 보내 계엄 기획 과정을 돕게 한 후 자신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고 전했다. 방첩사로 자리를 옮긴 인사가 1년 만에 원래 보직으로 돌아간 전례가 없다고 한다. 방첩사에서 장관 보좌관으로 인사 발령이 난 것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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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8일 육사 생도들이 서울 시내에서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개월도 안 된 합참차장 여인형 동기로 교체… 합참-방첩사 연결고리?
이번 계엄의 손발 역할을 한 여 전 방첩사령관, 곽종근(47기) 전 특수전사령관, 이진우(48기)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지난해 장성 인사에서 동시에 임명돼 주목을 받았다. 이와 상대적으로 용현파의 방첩사 장악은 주목받지 못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계엄부사령관에 임명된 합참차장 자리다. 김 전 장관은 해군인 김명수 합참의장 대신 계엄사와 합참의 가교 역할을 차장에게 맡기려 한 것으로 보인다. 여 전 사령관 임명 당시 합동참모차장에는 황유성 중장(46기)이 임명됐다. 박안수 육군참모총장과 육사 동기이며, 방첩사령관(전신인 기무사령관 포함)을 지낸 이후에 합참차장으로 임명된 첫 사례다. 하지만 황 차장은 올해 4월까지 합참차장을 지낸 후 6월 전역했으며, 한국일보에 “자신은 이번 계엄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현 사태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주목할 것은 이후 인사다. 황 전 차장 전역 후 강호필(47기) 대장이 5개월 여, 김봉수(47기) 중장이 2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정진팔(48기) 중장으로 잇따라 바뀌었다. 정 중장은 합참차장 임명 3일 만에 비상 계엄 발령으로 계엄부사령관을 맡았다. 군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정 차장은 여 전 사령관과 동기로, 2개월도 안 된 전임자를 교체한 것은 합참과 방첩사 간 소통을 위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소 전 참모장이 지난달 인사에서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옮긴 것도 석연찮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전임 정형균 소장은 임명된 지 불과 7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군 소식통은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 대위 등의 회유로 육사생도들이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펼친 것처럼, 소 교장을 통해 계엄 성공 이후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밑그림까지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계엄사령관을 맡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육사교장 이취임식 참석을 구실로 서울에 머물도록 미리 각본을 짰을 수도 있다는 게 군 내부의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