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못 놀라운 반응이었다. 3월 1일 자 한국일보에 실린 스타벅스 역사에 대한 글(’25년 만에 짜장면보다 싸진 스타벅스 커피…이래도 ‘된장녀’라고 모독합니까?’) 이야기다. 네이버 기준 평소 100배에 이르는 댓글이 달렸다. 그런 가운데 “왜 커피와 짜장면을 비교하느냐”는 항의 덧글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커피는 음료, 짜장면은 음식인데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아, 요즘 짜장면의 입지가 이렇구나. 그 글에서 짜장면이 등장한 이유는 음식의 대표이기 때문이었다. 건물이나 부지 면적을 설명할 때 ‘축구장의 몇 배’라고 설명하는 것과 어느 정도 결이 비슷하다. 아니면 같은 음식으로는 ‘빅맥 지수’도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 빅맥의 가격을 기준으로 세계 각 도시의 물가를 비교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는 짜장면이 오랜 세월 대중 음식의 대표 취급을 받아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짜장면은 외래 음식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의 100대 문화 상징에 속하며(2006년 선정), 정부의 물가 중점관리품목이다. 요즘의 가파른 생활 물가 상승을 짜장면 가격의 급변으로 설명하는 뉴스를 제법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물가정보 공개 자료에 따르면, 1970년 100원이었던 짜장면 한 그릇이 2023년 4월 기준 6,361원이다.
50여 년 세월의 변화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면 5년 전의 기준을 참고하면 된다. 2018년에는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5,011원이었다. 5년 사이 20% 이상 훌쩍 오른 셈인데, 2011년에는 4,220원이었으니 최근의 물가 상승이 상당히 가팔랐음을 알 수 있다. 각 재료별로 살펴보면 훨씬 더 극적이다. 2018년 대비 밀가루 가격은 46.9%, 양파는 166.7%, 오이는 무려 275.0% 올랐다.
서울 시내의 한 중식당 간판 모습. 연합뉴스
이처럼 짜장면으로 우리의 식생활 물가를 볼 수 있기에 스타벅스 커피도 등장 당시부터 ‘밥보다 비싼 커피’로 본의 아니게 비교를 당한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의 단편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많은 이들에게 와닿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이는 짜장면의 입지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민 음식으로서 만족스러운 한 끼였던 짜장면의 시대가 슬프게도 지나가 버렸다.
2005년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는 ‘짜장면 100주년 기념 축제’가 열렸다. 내년이면 짜장면 탄생 120주년을 맞는다. 근현대 한국의 역사가 온갖 침탈과 분단, 파괴 등으로 얼룩진 가운데 120년의 명맥을 유지하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은 출신을 떠나 매우 놀랍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만큼 짜장면 한 그릇에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전쟁 이후 패스트푸드화된 짜장면
옛 공화춘 건물에 들어선 짜장면박물관. 인천 중구 제공
잘 알려져 있듯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다. 말아 먹다시피 소스가 풍성한 형식의 짜장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산둥 지방에는 우리가 흔히 춘장이라 일컫는, 밀로 만들어 단맛이 나는 첨면장을 되직하게 볶은 소스의 자장몐(炸醬麵)이 있다. 마치 이탈리아 파스타 소스의 라구와 흡사하게 되직한 소스를 면에 일곱 가지 채소와 함께 버무려 먹는다.
1882년 임오군란을 거쳐 1884년 인천에 청국조계가 설정되면서 화교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산둥 출신이었다. 한국, 특히 인천과 그리 멀지 않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불안정, 홍수 등으로 인한 식량난 등에 시달리며 생활이 궁핍했다. 그런 가운데 일제 강점기의 한국에서는 광산 개발, 도로·철도·항만 건설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산둥 사람들이 대거 건너와 정착하게 되었다.
산둥 화교들은 쿨리(苦力), 즉 하역 인부이거나 인력거꾼, 짐꾼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바쁜 이들에게 끼니는 소중하면서도 간단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니 고향의 음식인 ‘자장몐’을 많이 먹었다. 손으로 쳐 뽑은 수타면에 앞서 언급한 볶은 첨면장을 비벼 얹은 면 음식이었다. 그런 자장몐이 1905년, 공화춘에서 짜장면으로 처음 팔렸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공화춘은 역시 산둥 출신인 우희광이 세운 음식점 겸 여관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산동회관’이었으나 191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미의 공화춘으로 상호를 바꿨다고 한다. 공화춘은 중화루, 동흥루와 더불어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부유한 청나라인들이 차렸던 인천의 3대 ‘청요릿집’으로 알려져 있다. 우희광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1984년까지 운영했으며 2006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 246호’로 등록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에서 짜장면이 저변을 넓힐 수 있었던 건 사실 차별 정책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활발히 경제 활동을 한 화교의 입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면서 대폭 좁아졌다. 한국전쟁에서 대적했던 중국도 중국 국민의 한국 진출을 금지했다. 이래저래 떠나기도 머물기도 어려워진 화교들의 처지를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한층 더 압박했다.
살기 어려워진 화교들은 상당수 한국을 떠났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10만 명 가까이 되었지만 1970년대를 지나면서 2만 명대로 줄었다. 이들 대부분은 어떤 경제 활동도 제대로 할 길이 막히자 생존을 위해 본의 아니게 요리를 선택했다. 큰 자본 없이 또한 가족끼리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화교 가운데 요식업계 종사자 비율은 1949년 40.3%에서 1972년 77%까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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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이 우리에게 익숙한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건 한국전쟁 이후이다. 소스의 양이 많아지면서 향신료가 빠졌고 핵심인 첨면장 혹은 춘장은 캐러멜을 첨가해 색이 까맣게 진해졌다. 이런 변화를 통해 짜장면의 소스는 미리 끓여 놓아도 되는 요소로 자리를 잡았으니, 어떻게 보면 짜장면의 패스트푸드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식 짜장면을 파는 중국집도 빠르게 늘어났다. 1948년에 전국 332곳에서 1972년에는 4,000여 곳에 이르렀다. 그렇게 짜장면은 최고의 외식이자 기념일의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경사가 있으면 가장 손쉽고도 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짜장면은 전성기를 누렸다. 1960~1970년대의 혼분식 장려 운동도 짜장면의 활황에 영향을 미쳤다.
‘서민 음식’ 정서 갇혀 낮아진 품질
인천 짜장면박물관에 전시된 음식 배달용 컨테이너. 배달 서비스가 늘면서 ‘철가방’으로 불리던 원조 배달 음식 짜장면의 입지는 좁아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짜장면이 인기를 누리다 보니 정부에서 견제에 나서기 시작했다. 온 국민이 즐겨 먹는 음식이므로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면 물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60년대부터 관리에 나섰으니, 짜장면 가격을 임의로 올린 음식점에 세금을 많이 물리거나 위생검사를 까다롭게 하기도 했다. 그 탓에 1950년대 후반만 해도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던 짜장면 가격이 1970년대에는 반 그릇 값으로 떨어졌다.
이런 관리 정책이 오랜 세월 동안 짜장면의 발목을 잡아 궁극적으로 한국식 중식의 쇠락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민 음식의 울타리 안에 현실은 물론 정서적으로 갇혀 있는 것이다. 짜장면을 비롯한 ‘식사’류를 포함해 실로 다양한 한국식 중식 요리들이 외식 문화를 주름 잡기도 했는데, 물가와 인건비가 오르는 만큼 품질의 향상을 꾀할 수 없었기에 세월이 흐르며 상대적으로 품질이 낮아졌고 결국 외면당하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디 그뿐이겠는가. 햄버거와 피자를 비롯한 미국식 패스트푸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짜장면의 지분이 줄었다. 게다가 중식 안에서도 동북식을 비롯한 ‘진짜’ 중식(전통 중식 요리사들은 “짜장면 하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하곤 했다)이며 마라탕, 양꼬치 등으로 결이 훨씬 더 다양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음식을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한 배달 서비스를 통해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원조 배달 음식이었던 짜장면의 입지가 되레 약해졌다.
그렇게 짜장면의 시대는 저물었다. 대부분의 짜장면은 한 끼 때우기에도 아까운 화학조미료 범벅의 소스에 배달에 버티도록 고무줄처럼 질겨진 소다면의 서글픈 조합이다. 그나마 아직도 짜장면을 제대로 낸다는 곳은 현재 불을 쥐고 있는 요리사가 은퇴하면 맥이 끊길 게 뻔한 오래된 곳들이다. 그런 가운데 2011년 8월 21일 ‘짜장면’이 ‘자장면’과 더불어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었다는 게 드문 호사이다. 너무 늦은, 짜장면에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음식평론가 이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