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결혼·출산 ‘3포 시대’ 여성 성욕 조명 콘텐츠 바람]

#1. 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주인공 정숙(김소연)은 방문 판매원이다. 주력 판매 상품은 여성용 진동 자위 기구인 바이브레이터다. 때는 1992년 가상의 지역인 금제. “진짜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어?”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주부 금희(김성령)가 바이브레이터 사용 후기를 묻자 정숙은 “네”라고 답한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정숙은 “안 써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써 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면서 “사업에 자신감이 생겼다”며 웃는다.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이 편의점에서 남자친구의 피임 제품을 직접 사고 있다. tvN 영상 캡처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이 편의점에서 남자친구의 피임 제품을 직접 사고 있다. tvN 영상 캡처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이 편의점에서 남자친구의 피임 제품을 직접 사고 있다. tvN 영상 캡처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이 편의점에서 남자친구의 피임 제품을 직접 사고 있다. tvN 영상 캡처

#2. “한 개로 돼? 오늘 밤도 너만 좋고 끝내면 네 인생도 끝낼 거야.” tvN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은 이런 말로 남자친구를 구박한 뒤 편의점에서 10여 개의 콘돔을 집어 계산한다. 해영이 생각하는 ‘조신함’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피임을 잘하는 것이다. 그는 “21세기의 조신은 ‘노콘(콘돔), 노섹스'”라고 말한다. 그런 혜영에게 동성 친구 희성(주민경)은 여성용 자위 기구를 선물로 준다.

여성의 성욕은 불온하다? 자아 찾기다!

여성의 성욕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드라마들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정숙한 세일즈’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여성의 성 용품 판매를 소재로 ‘여성의 욕망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환기했다면 ‘손해 보기 싫어서’는 해영 등을 통해 21세기 여성 욕망의 양상을 과감하고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간 TV 드라마에서 성욕은 남성의 전유물처럼 그려졌고, 여성은 성적으로 대상화되기 일쑤였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 변화다.

여성의 성욕을 그리는 방식도 확 달라졌다. ‘미스트리스'(2018) 등 드라마에서 여성 주역들의 성욕이 불륜이나 스릴러의 음습한 소재로 주로 활용됐던 것과 달리 ‘정숙한 세일즈’ 등에선 진정한 자아 찾기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여성의 가치를 ‘정숙함’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인식 변화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직격하는 방식으로 대중문화에서 뒤늦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국 드라마 ‘브리프 엔카운터스’를 원작으로 한 ‘정숙한 세일즈’는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로 유명한 최보림 작가가 각본을 맡았고, ‘손해 보기 싫어서’는 김혜영 작가가 대본을 썼다. 두 작가 모두 여성이다.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서영복(왼쪽 첫 번째, 김선영)이 여성 속옷을 방문 판매하고 있다. JTBC 제공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서영복(왼쪽 첫 번째, 김선영)이 여성 속옷을 방문 판매하고 있다. JTBC 제공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주인공 정숙(김소연)이 여성 성 용품 방문 판매를 시작한 뒤 그의 집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SEX' 문구를 지우고 있다. JTBC 제공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주인공 정숙(김소연)이 여성 성 용품 방문 판매를 시작한 뒤 그의 집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SEX’ 문구를 지우고 있다. JTBC 제공

‘테러’당한 정숙과 예고편 내렸던 ‘대도시의 사랑법’

적지 않은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시대’에 여성의 성 해방이 갑자기 왜 K콘텐츠의 화두로 떠올랐을까.

이런 흐름은 여성 혐오 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제기되며 존재를 위협받는 여성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정숙한 세일즈’에서 여성 성 용품을 판매하는 정숙은 일상에서 ‘테러’를 당한다. 그의 집 담벼락엔 ‘SEX’란 단어와 함께 ‘X’자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고, 남성 동창에게 강간을 당할 뻔하기도 한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다룬 티빙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일부 시민단체의 “동성애를 미화한다”는 항의를 받고 예고편이 온라인에서 한때 삭제됐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희정 대중문화 평론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욕구가 성욕인데, 여성들은 오랫동안 ‘정숙’이란 사회적 틀에 갇혀 주체성을 침해받았다”며 “‘정숙한 세일즈’는 그 억압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취약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면서 기본권 침해로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의미를 짚었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속 동성 연인의 모습. 티빙 제공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속 동성 연인의 모습. 티빙 제공

10대는 왜 ‘정숙한 세일즈’를 볼까

여성의 성욕을 조명하는 콘텐츠 제작 바람은 저출생 문제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데 대한 반작용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정숙한 세일즈’와 ‘손해 보기 싫어서’는 여성의 성적 욕망 억압과 사회적 차별을 꼬집으면서도 여성의 연애와 결혼, 출산을 지우지 않는다.

복길 대중문화 평론가는 “두 드라마는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인정,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철폐, 여성의 경제적 안정과 지위 향상만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임을 친근하게 설파한다”며 “여성의 이기심을 저출생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 대한 반론처럼 들리는 게 두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일보가 ‘정숙한 세일즈’ 1회와 최근 방송 회차인 8회의 성·연령별 시청률을 확인해 보니, 10대 여성 시청자률이 전 연령 통틀어 가장 많이 증가(233%)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그간 여성의 성에 대해 다루는 드라마가 거의 없었고, 다룬다고 해도 남성을 전제로 하는 연애 담론에 머물렀다”며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이야기가 성에 대해 통제받는 10대의 관심을 끈 것“이라고 봤다.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이주리(이세희)와 무능한 남편 대신 집 생계를 책임지는 서영복(오른쪽, 김선영)이 속옷을 직접 입고 방문 판매하고 있다. JTBC제공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이주리(이세희)와 무능한 남편 대신 집 생계를 책임지는 서영복(오른쪽, 김선영)이 속옷을 직접 입고 방문 판매하고 있다. JTBC제공

“이런 얘기 세상 밖으로 나올 때도”

파격 소재를 통한 콘텐츠 제작 변화에 배우들도 기꺼이 동참했다. ‘정숙한 세일즈’에서 정숙을 연기한 김소연은 “촬영 전 남편(배우 이상우)과 무인 성인 용품 가게에 다녀왔다”며 “드라마의 메시지를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유쾌하게 전달하고 싶어 고민했고, 긴장하며 촬영하다 첫 방문 판매 에피소드를 찍고 난 다음 날 몸살을 앓았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1회에서 정숙이 동네 여성들을 모아 바이브레이터를 설명하고 여성용 속옷을 파는 에피소드 촬영은 무려 12시간 동안 진행됐다. 여자대학 출신으로 약사인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 성인 용품 판매로 삶에 대한 욕망을 되찾는 금희를 연기한 김성령은 “이런 얘기들이 좀 더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도 이제 괜찮지 않나 싶었다”고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들려줬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동성애자 고영 역을 맡은 남윤수는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최근 2, 3주 동안 ‘이렇게라도 (성소수자의 사랑을) 표현해 줘서 고맙다’ 등의 메시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1분에 3, 4개꼴로 왔다“며 “(성소수자 배역에 따른) 부담은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신념대로 연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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