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같다던 헤즈볼라 수뇌부, 열흘 만에 궤멸… “벙커 회의도 들여다본 이스라엘 정보전 위력”
나스랄라 지하 벙커서 회의 중 공습
며칠 전부터 ‘제거’ 검토하다 결행
“모사드, 가장 은밀한 곳까지 침투”
40년 악연 헤즈볼라, 코너 몰아세워
레바논 친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수장이자 상징이었던 하산 나스랄라의 암살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그간 벌여온 첩보전의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무선호출기(삐삐) 폭탄’ 공격부터 나스랄라 제거까지, 열흘간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한 작전 모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스파이들에 완전히 침식당했음을 보여 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령’이라고도 불렸던 헤즈볼라 지도부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추적했고, ‘표적 공습’을 통해 콕 집어서 잇따라 살해했기 때문이다.
지하 회의 장소·시간 포착… 네타냐후, 뉴욕 호텔방서 작전 승인
28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소식통을 인용해 “이스라엘군에 암살되기 전인 27일 밤, 나스랄라는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의 지하 18m 깊이 벙커에서 지도부 회의를 열고 있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수뇌부 인사들은 회의 참석자였던 이란혁명수비대 작전부사령관에게 ‘이란이 이스라엘에 더 공세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불만을 전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회의 개최 사실이 몇 시간 전부터 이스라엘에 포착됐다. 나스랄라의 회의 소집 명령과 동시에 언제, 어디서, 누가 모이는지 실시간으로 정보가 몽땅 유출된 셈이다. 수개월 전부터 ‘나스랄라 제거’를 준비해 왔던 이스라엘군은 곧장 작전 결행을 건의했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방문 중이었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뉴욕 호텔방에서 전화로 작전 승인 명령을 내렸다. 중동 확전을 억제하려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뻔했기에, 그리고 보안 유지를 위해 미국 측에 사전 통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적 수장 제거’가 가능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촘촘하게 짜둔 ‘스파이 네트워크’ 덕분이라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전직 고위 간부 오데드 에일람은 미 워싱턴포스트(WP)에 “이스라엘 정보부는 헤즈볼라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침투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헤즈볼라 최고위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 암살(7월 30일), 삐삐·무전기 동시다발 폭파 공격(이달 17, 18일), 정예 특수부대 라드완 여단 총사령관 이브라힘 아킬 제거(20일) 등 일련의 과정도 정보 역량 발휘의 결과다.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의 헤즈볼라 전문가 힐랄 카샨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헤즈볼라 내부에) 침투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침식을 했던 것”이라고 짚었다.
2006년 패배 뒤 정보역량 칼 갈아… ’40년 악연’ 끝장 볼 태세
이스라엘이 정교한 정보전에 나선 계기는 2006년 레바논 침공(2차 레바논 전쟁)에서 경험한 패배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토벌하겠다며 지상군을 투입해 34일 동안 싸웠지만, 게릴라식 전술에 당해 이렇다 할 전과 없이 굴욕적으로 철수했다. 이때의 교훈으로 적의 도발에 그때그때 대응하는 ‘잔디 깎기’ 전략 대신, 대규모 공습과 지도부 살해 등 치명타를 가하는 ‘결정적 승리’ 전략으로 전환하게 됐다고 WP는 전했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이 2006년 이후 도·감청, 위치추적, 통신망 해킹 등 막대한 자원을 정보 역량 확보에 투입했고, 그 결과 인공위성과 첨단 무인기(드론)를 통해 헤즈볼라 무기 창고 내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특히 과거 점조직 형태의 헤즈볼라가 점차 비대화하면서 모사드의 스파이 침투가 용이해졌다는 분석도 많다. 이스라엘의 정보 작전은 ‘방어’보다는 ‘공격’에 더 강점이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스라엘은 이참에 헤즈볼라와의 ’42년 악연’을 끝장내려는 태세다. 레바논에 지상군을 투입할 채비도 갖추고 있다. 198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쫓던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 침공(1차 레바논 전쟁)을 계기로 결성된 헤즈볼라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폭탄 테러·로켓 공격 등으로 이스라엘과 싸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