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인공지능(AI) 분야에서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 기업들의 투자가 강화되고 있으며, 역외 클라우드 접속을 이용해 대중국 수출이 금지된 엔비디아의 첨단 칩을 사용하는 사례도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현지시간) 비트코인 채굴업자 출신으로 중국 업체와 거래하고 있는 사업가 데릭 오 씨 등을 인용해 중국 AI 기업들이 미국 제재를 우회해 엔비디아의 첨단 칩 H100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엔비디아 반도체가 밀수 등을 통해 중국 내수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는데, 아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실물을 수입할 필요 없이도 클라우드상에서 첨단 칩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비스 구매·판매자 간 결제는 가상화폐·블록체인 관련 기술을 이용해 익명성을 확보하고 있다. 계약 당사자는 글자와 숫자 조합으로만 식별되며 구매자는 가상화폐를 이용해 대금을 지불한다.
오씨는 미국과 아랍에미리트(UAE) 등에서 투자자들을 모집해 엔비디아 H100 칩이 들어간 AI 서버들을 매입했고, 지난 6월 호주의 한 데이터센터에 300여대의 서버를 갖췄다.
이 서버들은 그로부터 3주 뒤 중국 베이징 소재 기업들을 위해 구동을 시작했다.
그는 “수요가 있고 이윤이 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 공급할 것”이라면서 “지난해 말부터 중국 고객 숫자가 크게 늘었다. 엔비디아 칩을 갖추고 있는지 문의를 자주 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한국 등의 투자자들로부터 추가 자금을 모아 엔비디아의 최신 블랙웰 칩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이를 중국 업체의 싱가포르 자회사에 제공할 계획이라면서 미국의 수출통제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세계 곳곳에 있는 컴퓨팅 연산 능력을 모아 AI 업체에 임대하는 ‘탈중앙화 그래픽처리장치(GPU) 모델’을 쓰고 있다.
최근까지 중국 AI 스타트업에서 근무했던 조지프 체 씨는 자신의 회사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데이터센터를 이용해 AI 모델을 훈련했다고 말했다. 이 데이터센터에는 H100 칩을 이용한 서버가 400대 이상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공급업체는 3천개 이상의 GPU를 연결하고 있으며, 컴퓨팅 연산 능력을 대량으로 구매 시 H100의 시간당 이용 요금을 2달러 이하로 해줄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WSJ은 역외 컴퓨팅 연산 능력을 임대해 쓰는 방식은 새로운 게 아니며, 연산 능력구매·판매·중개도 법 위반이 아니라는 변호사들의 견해가 나온다고 소개했다.
미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장비·기술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하고 있지만, 해당 규정은 중국 기업이 엔비디아 반도체를 이용하는 미국 클라우드 서비스에 접속하는 것까지 제한하지는 않는다는 게 클라우드 업체들의 입장이다.
미국 수출 규제에 구멍이 있다는 지적 속에 미 상무부는 지난 1월 악의적인 외국 집단이 AI 모델 훈련 등을 위해 미국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규정을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클라우드 업체들은 해당 규정은 남용을 막지 못하고 미국 업체들의 경쟁력만 떨어뜨린다고 비판하고 있다.
엔비디아 측은 WSJ의 논평 요청에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미국의 수출 통제를 따르고 있으며 협력사들도 그렇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중국 빅테크(거대 기술 기업)들이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올해 AI 분야 설비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
알리바바·텐센트·바이두의 지난 상반기 설비투자 합계는 500억 위안(약 9조3천억원)으로, 전년 동기 230억 위안(약 4조3천억원)의 2배 이상이다.
이들은 AI 모델 훈련과 관련된 프로세서와 인프라 시설에 대한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알리바바의 상반기 설비투자액은 230억 위안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3% 늘었고, 텐센트의 설비투자도 176% 늘어난 230억 위안이었다.
엔비디아는 H100보다 저사양으로 중국 수출이 가능한 H20을 출시한 상태로, 애널리스트들은 향후 몇 달간 엔비디아가 중국 기업들에 인도할 프로세서가 100만개 이상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해당 프로세서는 개당 1만2천∼1만3천 달러(약 1천590만∼1천723만원) 수준이다.
바이트댄스(틱톡 모회사)도 AI 관련 지출을 늘리고 있으며, 중국 내 데이터센터를 위해 엔비디아 칩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