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산업 발전 기대감에 힘입어 증시 상승을 이끌어온 반도체주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렸다. 국내 시가총액 1·2위 기업인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는 10%대 곤두박질쳤다. 지난달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AI 빅테크들의 실적 둔화 우려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결함 논란까지 더해지며 외국인의 ‘매도 폭탄’을 맞았다.
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10.30%, 9.87% 하락한 7만 1400원, 15만 61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삼성전자가 10%대 하락률을 보인 것은 미국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10월 24일 14.07% 급락 이후 약 15년 9개월 만이다. 6월 중순 ‘8만 전자’를 달성한 지 2개월도 채 안 돼 7만 원대로 주저앉았다. 이날 두 기업뿐 아니라 HPSP(403870)(-20.10%), DB하이텍(-13.24%), 한미반도체(042700)(-11.09%), 원익홀딩스(030530)(-11.02%) 등 반도체 후공정 및 장비 관련 종목들도 줄줄이 곤두박질쳤다.
주가 하락은 외국인 매도세가 거세지며 더욱 심화됐다. 외국인은 이날 삼성전자를 1조 2317억 원어치를 팔아치웠다. SK하이닉스도 2299억 원가량 순매도했다. 코스피 전체 외국인 순매도액 1조 5247억 원의 95.9%에 달하는 금액이다. 두 기업은 이날 하루에만 시가총액이 각각 48조 9522억 원, 12조 4488억 원 증발했다.
이로써 반도체 ‘투톱’에 최근 2조 원가량을 순매수한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은 불가피하게 됐다. 개인투자자들은 지난달 24일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4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3을 납품하기 위한 품질 검증을 처음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이달 2일까지 9851억 원을 사들였고 SK하이닉스가 2분기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을 발표한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2일까지 1조 1496억 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주가가 급락한 것은 미국발 경기 침체 우려가 글로벌 증시를 덮친 가운데 ‘AI 회의론’까지 겹친 여파로 풀이된다. 또 엔비디아 차세대 AI 가속기 블랙웰의 출시 시점이 최소 한 분기 지연될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반도체 투자심리를 악화시켰다. 엔비디아는 최근 대만의 TSMC와 블랙웰 B200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이 2일(현지 시간) 실적 부진으로 하루 만에 26.05% 급락한 영향도 컸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만약 현재 초기 AI 투자기에 경쟁적으로 가속기 반도체를 확보 중인 미국·중국 빅테크 업체들이 비용 증가, AI 매출 저조, 재고 증가, 경기 둔화 등의 이유로 내년부터 투자 강도를 완화한다면 HBM 수요도 현재 시장의 높은 기대치를 하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이번 반도체주 급락 사태를 대규모 하락장보다는 조정 국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블랙웰 라인업의 제품 변화가 AI 공급 체인에 유의미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며 “아직까지 HBM 판매 주력은 HBM3이므로 블랙웰이 당장의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