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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쟁이로 남고 싶었던 김민기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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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1일 한국인들에게는 제 2의 애국가 ‘아침 이슬’로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김민기 학전 대표가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튜브, 소셜 미디어는 그를 추모하는 영상과 노래 존경하는 글들로 가득찼다. 최근 유명 인사가 사망했을 때 이처럼 자발적인 존경심과 추모의 글이 도배된 적이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만큼 김민기 전 대표의 삶이 고귀하고 순수했고 스스로 뒷것이라고 표현한데서 자신을 한없이 낮춤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다. 국내에서 위암 치료는 권위적이고 치료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간으로 전이돼 아쉽게 삶을 마감했다.

무대의 배우를 앞것, 스태프를 뒷것으로 낮췄던 그는 마지막 세상과 인연을 정리할 때도 잘
드러난다. 장례는 비공개로 하고 조화와 조의금은 사절한다고 가족들이 밝혔다. 보도에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지만 동영상은 없었다. 장례식장의 모습은 공개되지 않았다.

첫 부고 기사에는 상주 이름도 알리지 않았다. 회화과 출신의 부친 DNA를 이어받았는지 두 아들 나란히 건축가다.

필자는 김민기의 노래를 좋아했고 학벌도 좋은 유명인임에도 자신을 낮추는 삶에 늘 존경하는
마음을 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침 이슬’은 18번 애창곡이었다. 다소 구슬픈 ‘친구’도 애창곡
가운데 하나였다. 고교 시절 친구가 대천 해수욕장에서 익사해 그를 추모하면서 만든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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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있다. 1986년 여름 비오는 날 서울 평창동의 모 갤러리 결혼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례객들은 비를 맞으면서 김민기, 이영미 부부를 축하했다. 그때 음악을 맡은 분이 유명 국악인 김영동 씨다. 부인 이명미와는 한 때 직장 동료였다.

1980년대 장충동 국립극장 공연과에 근무할 당시 옆 자리에서 근무했다. 나이도 동갑이고 술좌석도 자주했다. 마지막 고교 시험시대의 그녀는 경기여고, 서강대(영문과)를 졸업했다. 영어에 능통했다. 극장내 영어 업무(영자 브로셔등)과 함께 극단 담당을 했다. 당시 국립극단 배우들은 쟁쟁했다. 고인이 된 장민호, 백성희, 손숙,권성덕, 정상철 등 한국 연극계의 레전더리들이 국립극단을 지켰다.

국립극장에는 영어를 번역하고 통역하는 직원이 이미영 씨 뿐이어서 약간의 특혜를 누렸다.
야행성이어서 출근이 늦었는데 상사들이 이를 허용했다. 김민기 씨와의 만남도 연극을 통해서다.
고인은 경기고 서울대 미대 출신이다.

부인 이미영 씨가 동료였던 터라 가수, 작곡가, 뮤지컬 연출자, 공연 기획자로서의 김민기의 행적에 늘 관심을 가졌다. 원래 좋아했던 터였고 부인과의 인연이 덧씌웠던 탓에 더 관심이 있었다.

요즘은 LA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자리잡은 전 라디오 코리아 이장희 사장도 고인과 각별하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 이른바 세시봉 멤버들과 교류가 매우 깊다. 박정희의 엄혹한
유신시절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송창식의 녹음 스튜디에서 녹음했다.

두 사람 모두 목숨걸고 한 거사다. 이장희 전 사장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세시봉 친구와 함께 꼭 김민기를 만났다. 고인이 후배이지만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했다. 고인도 이장희 사장이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했다. 이장희 전 사장은 고인이 워낙 술을 좋아해 자제하라고 늘 당부했다는 말을 자주했다.

별세 후 장례식에 참석한 학전 배우들도 “저세상에서도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맥주를 드시라”고
SNS에 글을 남겼을 정도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미국 포크송의 영향을 받은 게 한국의 대학생들이다. 통기타롤 통하는 청년 문화다. 한대수, 트윈폴리오(윤형주-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등이 대표적이다. 포크송의
특징은 싱어 송 라이터다. 자신이 직접 곡을 만들고 부른다. 반전의 상징 노래 Blowin’ In The Wind의 밥 딜런을 연상하면 된다.

김민기는 한국의 1세대 싱어 송 라이터인 셈이다. 1971년 딱 한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한 장의 앨범 파괴력이 이처럼 큰 가수는 없다. 단 한 장의 앨범에 박정희는 불온 딱지를 붙였고 그는 본인과는 상관없이 ‘저항 가수’로 자리매김됐다.

실제 김민기의 삶과 인터뷰 등에서 저항적인 흔적은 없다. 방송 인터뷰-몇 개에 불과하지만-에서
발언은 저음의 톤으로 높낮이가 없다. 어눌할 정도로 차분하다. 본인은 태생적인 저음으로
가수와는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가수로 출발했으나 노래하는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학전의 배우들이 뒤풀이나 사석에서 연출가이자 선생님에게 노래해줄 것을 요청하면 정색했고 한 차례도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수이면서 가수를 부인했던 뮤지션이다. 저항 가수로 김민기를 자리매김했지만 저항적인 노래와 투쟁을 한 적이 없다. 가수, 연출가, 공연기획자, 극단대표 등으로 불리웠지만 본인은 그냥 ‘쟁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유신시대와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에 가장 탄압받은 뮤지션은 신중현과 김민기다. 둘은
이름 자체로 불온이고 금지곡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한국 대중 음악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천재라는 점이다.

가수 조영남은 김민기 타계 후 모 신문에 추모글을 올리면서 “그는 천재다”라고 못을 박았다. 신중현은 1960년대 왜색풍의 트로트 음악 일색에서 소울과 블루스 등으로 음악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신중현은 음악의 장르를 바꾼 인물이다.

김민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대중에 전달했다. 아침 이슬도 그렇지만 상록수, 봉우리 등의 가사는 쉬우면서도 우리 정서에 딱 맞는다. 애초에 아침 이슬도 가삿말이 뛰어나 정부에서 건전가요로 지정했었다. 갑자기 시위대에서 아침 이슬이 합창으로 불려지면서 금지곡으로 딱지를 붙였다.

레전더리 밥 딜런은 그의 수려한 가삿말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가가 아닌 노벨 문학상은 윈스턴 처칠(연설문)과 밥 딜런 두 명이다. 김민기도 딜런못지 않는 가사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아침 이슬은 애국가 다음으로 많이 불리는 곡이다. 뮤지컬 지하철은 독일의 원작자가
감탄할 정도로 한국화에 성공했다.

미국이었다면 김민기는 대통령 자유메달을 수상할 만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뮤지션이자 연출가로 평가받았을 만하다. 민주정부 문재인 대통령 재임 때인 2018년 문화훈장 은장을 수여받은 게 정부가 인정한 공로의 전부다.

2024년 7월에는 모두가 숟가락을 얹으면서 너도 나도 고인을 칭송하고 있지만…

어두운 시대 김민기의 음악이 있었기에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고마웠습니다.

문상열 H매거진 스포츠 전문기자 moonsytexas@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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