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4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납품한다. 엔비디아·TSMC·SK하이닉스로 구축된 인공지능(AI) 가속기의 ‘3자 동맹’에 끼지 못했던 삼성이 마침내 도전자 인증을 받고 경쟁 무대에 등장하게 된 셈이다.
로이터통신은 24일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3 납품을 위한 퀄 테스트(품질검증)를 통과했으며 이번에 공급되는 HBM3는 중국 수출용으로 개발된 H20 그래픽처리장치(GPU)에 공급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H20은 미국의 첨단 AI 칩 수입 규제를 받고 있는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엔비디아가 스펙을 낮춰 설계한 제품이다. 구체적인 제원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엔비디아의 주력 칩인 H100 성능의 4분의 1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성능 다운그레이드에도 불구하고 칩 1개당 가격이 1만 3000달러(약 1800만 원)에 달한다. 엔비디아가 이 칩을 올해 중국에 100만 개 이상 판매할 것이라는 시장분석 기관의 전망치가 나오기도 했다. 단순 계산하면 이 칩 하나만으로 중국 시장에서 18조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화웨이가 어센드910B와 같은 AI 가속기를 만들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산 수율이 낮고 탑재되는 메모리의 성능도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엔비디아가 중국 시장의 폭발적인 수요를 맞추기 위해 삼성에 손을 내밀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동안 ‘고객사인 엔비디아가 아니라 원청 업체 격인 TSMC로부터 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루머가 나올 정도로 자존심을 구겼던 삼성전자 입장에서 엔비디아 공급망에 포함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일단 문턱을 넘어섰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며 “HBM3E 등 5세대 제품에 대한 공급도 빠르게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불안 요인도 남아 있다. 당장 SK하이닉스와의 기술적 격차가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HBM3E 8단 제품을 이미 공급하고 있고 올 3분기 중 HBM3E 12단 제품의 퀄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도 8단 제품에 대한 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1단계 이상 격차가 벌어져 있는 셈이다. 로이터통신도 “HBM3E 8단의 퀄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으로 수출되는 H20에 삼성 제품이 탑재되는 것도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소다. H20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내놓은 대중국 수출 규제를 우회해 만든 제품인데 미 대선 정국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 규제의 타깃이 될 수 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캐파(생산 능력)를 높여 놨더니 주문 자체가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인데 삼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에서는 삼성이 5세대 시장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6세대 HBM4부터 본격적인 판도 변화를 노리는 ‘빅 점프’ 전략을 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6세대 HBM4는 기본 구조부터 전 세대와 다른 최첨단 칩이다. 전 세대 HBM은 GPU 주변에 수평으로 HBM을 배열해 연산을 도왔지만 HBM4부터는 GPU 위에 HBM을 수직으로 쌓아 연산 속도를 높인다. 이때 GPU와 HBM 사이를 연결하면서 일종의 두뇌 역할을 하는 부품이 로직다이(베이스다이)다. 자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팹을 갖춘 삼성은 로직다이를 자체 생산할 수 있어 TSMC에 생산을 맡겨야 하는 SK하이닉스 등 경쟁자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삼성이 약하다고 평가받았던 D램 본딩(접착) 공정에서도 6세대부터는 삼성이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평가가 함께 나온다.
삼성전자는 이날 로이터 보도와 관련해 “엔비디아에 대한 특정 제품 퀄 통과 및 납품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