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 있는 재고를 보면 건설자재 성수기는 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자체 감산까지 나섰겠습니까.”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10일 국내 철강 생산량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것을 두고 “판매량보다 재고량이 많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건설 경기 악화가 철강을 비롯한 건설자재 업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생산량을 줄이는 특단의 조치에도 제품이 팔리지 않으면서 재고는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상황이다. 결국 제철소의 전기로는 낮 시간 운영을 포기했고 시멘트 공장의 차량들은 운행을 멈췄다.
철강 업계에 따르면 건설 현장에 주로 쓰이는 철강재인 철근의 재고량은 올해 4월 기준 64만 7000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7만 4000톤 대비 36% 늘었다. 건설 경기가 꺾이면서 내수 판매량이 급격히 줄어든 탓이다. 실제 올해 4월 내수 판매량은 70만 9000톤으로 지난해보다 15% 감소했다.
건축 시 강관 구조 등에 쓰이는 열연강판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올해 4월 재고량은 89만 3000톤으로 판매량(84만 1000톤)보다 남아 있는 물량이 더 많다. 국내 제철소의 한 관계자는 “호황기는 물론 예년과 비교해도 슬래브(열연의 반제품) 재고가 많이 쌓여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후판 역시 내수 판매가 10% 이상 줄어들면서 재고는 20% 더 쌓여 있다.
이에 철근 유통 업체는 철강 업체로부터 톤당 약 90만 원에 구입한 철강 제품을 약 70만 원에 판매하는 등 손해 보는 장사까지 하고 있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저가 중국산까지 밀려들면서 제품 가격은 밑지는 수준으로 내려갔다”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재고털이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철강과 함께 건설 시황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시멘트 업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시멘트협회 등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시멘트 생산량은 1049만 톤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0.6% 감소했다. 출하량은 13.3% 줄어든 1053만 톤이며 재고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1.3%나 늘어난 129만 톤으로 집계됐다.
시멘트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봄철이 되면 겨울철에 쉬었던 건설 경기가 살아나면서 시멘트 물량이 부족해지는데 올해는 재고가 넘쳐 나는 상황”이라며 “하반기에도 기대하기 힘들어 기업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업계 1위인 쌍용C&E(003410)의 올해 1분기 시멘트 생산량은 252만 1000톤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7.4% 줄었다. 같은 기간 한일시멘트(300720)의 생산량도 10% 가까이 감소했다.
철강과 시멘트의 재고량 급증은 건설공사가 모두 멈출 정도의 업황 악화가 장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주택 인허가 건수는 7만 4558가구로 1년 전에 비해 22.8%나 감소했다. 미분양 주택도 4월 기준 7만 1997가구로 전월보다 10.8% 늘어나며 5개월 연속 증가세를 보였다.
최근 부동산 시장은 고금리와 경기 침체로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수익성을 담보하는 강남권 재건축 조합들도 시공사 찾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에는 시공능력평가 16위 태영건설이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을 신청해 부동산 위기론을 키웠다.
급기야 업계는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고강도 감산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동국제강(460860)은 이달부터 인천 전기로 공장을 밤에만 운영하기로 했다. 이 공장은 연간 220만 톤의 철근을 생산하는데 이번 조치로 생산량이 약 35%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공장 가동률은 87% 수준에서 60%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동국제강의 한 관계자는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만 일하는 야간 생산 시스템으로 전환했다”며 “우선 8월까지 유지하고 이후 시장상황을 봐가며 지속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체절은 인천공장 전기로 대보수를 2월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당진공장 전기로 라인을 대상으로 대보수를 실시할 계획이다. 시멘트 업계도 정기 보수 기간을 예년보다 길게 유지하고 있다. 건설자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기 보수로 한숨 돌리며 생산량을 조절하는 분위기”라며 “상황이 계속 나빠지면 보수가 끝나고도 자체 감산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철강 업계 큰형인 포스코는 최근 임원들이 주 5일제 근무로 복귀했다. 전 임직원에 격주 간격으로 주 4일제를 도입한 지 4개월여 만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건설 경기 악화에 저가 중국산 철강까지 들어오면서 국내 철강 업계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며 “일부 업체에서는 고강도 구조조정까지 언급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