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켄PD의 이민야사
80년대 초반 영국의 컬처클럽 이라는 밴드가 한국에서 유명하던 시기가 있었다. 리드 싱어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남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리더 보이 조지는 여장 남자였던 것이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넘겼던 기억이 있다.
이후 86년도에 미국에 와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게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이해도 안 됐고 당시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젠더와 게이의 구분도 없던 시절이었다.
다만 당시 살던 지역이 LA에서도 유명한 성 소수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실버레이크 근처여서 커가면서 남자들 혹은 여자들끼리 애정 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은 참 한국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1 년 간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겨우 겨우 산 중고차 유리창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손으로 적은 편지에는 to: The owner of beautiful black car 라고 적혀 있었고 손으로 정성스럽게 적은 손 편지가 있었다.
편지 내용을 읽어보니 앞집에 살고 있는 누구라고 자기소개가 적혀 있었고 나와 이웃이 되어서 반갑다는 내용과 함께 같이 운동도 다니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역시 미국인들은 참 친절하구나 이젠 미국인 친구도 생기면 영어도 금방 배우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낸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었다.
며칠 후 차를 타려 는 데 통통하고 귀엽게 생긴 백인 남자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보낸 편지를 읽어 봤냐며 이야기를 꺼내는데 행동이나 말투 그리고 여성스러운 몸짓들이 당장 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나는 게이도 아닌데? 생각해 보니 친구들이라고 다들 남자들만 집에 놀러 오니 미국인 입장에서는 한참 여자친구도 만날 고등학생이 남자들 하고 만 다니니 한국인 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면 쩍게 인사에 답을 하고 며칠을 사전을 뒤져 보며 그 친구가 상처를 안 받게 정중하게 대화를 적어서 설명을 했다.
그때부터 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살던 동네는 LGBTQ가 많아서 해마다 성 소수자 퍼레이드를 했었는데 3년 동안 무슨 퍼레이드인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늘 놀러 가곤 했었다. 확실히 미국과 한국의 인식 차이는 꽤 컸다.
미대로 대학을 들어가니 주변에 성 소수 자들이 더더욱 많아졌다. 교수부터 해서 학생들까지 스스럼없이 자기 성 취향을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들게 되었다.
당시 뉴스에 어떤 한인 부부 이야기가 나왔다. 부부싸움 끝에 경찰이 출동해 남편이 구치소에 끌려갔는데 구치소 안에서 다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고 나와서 충격 끝에 와이프를 살해하고 본인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뉴스였다. 하긴 당시 80년대 한국에서 남자가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을 듯하다.
90년대 한국도 성 소수 자들이 방송에서 하나 둘 씩 커밍아웃을 하면서 사회적인 인식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한국에도 성 소수 자들이 있었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광고 계에 일하다 보니 주변에 한인 성 소수 자들도 하나 둘 씩 알게 되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의 차이들도 알게 되었다. 또한 한국인들 중에서도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LA처럼 한인들이 많은 곳에는 게이바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래처에 알던 대표 님이 계셨는데 상 남자 스타일에 리더십이 강한 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들이 다 커서 분가를 하고 난 뒤 가족들을 모아 놓고 본인의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본인은 원래 동성이 좋았지만 당시 한국의 분위기에 그런 표현도 할 수 없었고 부모님의 기대도 저버릴 수 없었고 가정도 꾸려서 자손도 이어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 생활했었다며 이제라도 자녀들이 다 컸으니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면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결국 그분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 한다. 가족들의 충격도 컸겠지만 그때 느낀 것은 한국이 바뀌어서 성 소수 자가 많아진 게 아니라 60년대도 70년대도 똑같은 비율로 성 소수 자들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때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자식으로는 책임감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본인의 성향을 숨기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이 아무리 성 소수 자에게 관대해졌다 하더라도 한평생을 같이 산 아내와 자녀들에게 충격을 주고 떠난 가장이 용서 받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분은 미국에 와서 살 기회가 있었으니 용기를 얻고 남은 여생을 본인의 성향대로 살 기회라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직도 교민 사회에는 남모를 고민을 안고 사는 성 소수 자들의 이민 야사(移民野史)가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켄PD 유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