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6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침묵’을 택했다. 대통령실 역시 아무런 입장도 내지 못하고 숨죽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날 탄핵 찬성으로 급선회하며 여당 내부가 종일 요동쳤지만 용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당 일각에서 탄핵을 막아서기 위해 대국민 사과나 임기단축 등 ‘플랜B’를 검토해야 한다는 요구가 전달됐지만, 대통령의 ‘결단’은 없었다. 윤 대통령은 한 대표가 던진 쇄신 요구안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여인형 방첩사령관 등 계엄군 지휘관의 경질을 수용하는 데 그쳤다.
지난 4일 오전 4시 27분 비상계엄 선포 해제 발표 이후 윤 대통령은 이날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진석 비서실장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등 극소수 참모들과 국회와 군, 여론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나머지 대통령실 참모들도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피했다.
야당이 예고한 탄핵안 표결을 코앞에 둔 만큼 윤 대통령이 이날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국민의힘에서도 윤 대통령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한다는 건의가 전달됐지만, 여론을 달랠 만한 어떤 액션도 나오지 않았다.
尹, 여인형 방첩사령관 등 계엄군 지휘부 경질만 수용
이날 윤 대통령에겐 정국을 돌파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탄핵 불가를 공언했던 한 대표가 이날 오전 탄핵 찬성으로 돌아서며 최후통첩을 날리자, 윤 대통령이 먼저 한 대표와의 만남을 제안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한남동 관저에서 오후 1시쯤 만났다. 한때 윤 대통령의 대통령실 최측근이었던 주진우 의원도 함께였다. 한 대표의 작심 발언 이후 성사된 면담인 만큼, 여권 일각에선 대국민 사과를 포함한 특단의 조치가 나오지 않겠냐는 기대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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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의원총회 도중 회의장을 잠시 나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 차이만 확인한 채 빈손으로 돌아섰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과의 면담을 마친 뒤 국회로 복귀, 여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윤 대통령이 현재로선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제 판단을 뒤집을 만한 말을 듣지 못했다. 탄핵안 부결 당론은 못 바꾸겠지만 제 의견은 윤 대통령이 업무정지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윤 대통령이 이날 한 대표에게 내놓은 최소한의 쇄신조치는 비상계엄에 가담한 여인형 방첩사령관 경질이었다.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한 대표는 윤 대통령에게 여 방첩사령관 경질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면담 이후 소수 참모들과 회의를 연 뒤 여 사령관에 대한 대기발령 조치를 지시했고, 국방부는 여 사령관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과 곽종근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을 직무정지시키고 내란죄 등으로 고발되거나 연루된 군인 10명에 대해 긴급출국금지를 신청했다.
이들에 대한 인사조치만으로 한 대표의 변화를 기대했던 윤 대통령과 달리, 한 대표는 윤 대통령의 ‘업무정지’ 결단에 방점을 찍으면서 두 사람은 결과적으로 평행선을 달렸다. 한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은 여 사령관에 대한 조치만 취하면 한 대표가 탄핵을 막아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윤 대통령이 한 대표가 ‘탄핵안 부결’을 조건으로 내세운 여 사령관에 대한 경질 요구를 1차적으로 수용한 것 자체가 추가 결단에 나설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시그널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한 대표도 측근 의원들에게 탄핵안 찬성 메시지를 대놓고 주문하지는 못할 것이란 예상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과 한 대표 회동 이후 대통령실과 당이 추가 논의를 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추경호 원내대표와 당 대표 비서실장인 박정하 의원이 밤늦게 정진석 비서실장 등 참모와 접촉했고, 특히 추 원내대표는 이날 수시로 의원들의 우려나 요구사항을 대통령실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관계자는 “탄핵안 표결과 별개로 윤 대통령의 사과 메시지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韓과 면담 후 인사 재가, 대통령직 수행 의지 피력
윤 대통령은 한 대표와 면담 직후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장관급) 임명안을 재가하는 등 정상 업무를 보며 대통령직 수행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계엄 사태 이후 언론 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던 대통령실도 계엄군의 정치인 체포 작전 관련 보도가 나오자 “대통령은 그 누구에게도 국회의원을 체포, 구금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는 메시지를 내며 반박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국회를 찾은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이 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폭로하자, 곧바로 입장을 취소하는 등 혼돈의 상황을 이어갔다.
이날 미동조차 없는 윤 대통령 탓에 야당을 중심으로 2차 계엄에 대한 경고도 잇따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늘 밤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며 하루라도 빨리 직무정지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긴급 담화를 통해 “제2 비상계엄은 있을 수 없다”며 “만에 하나 또 한번 계엄 선포라는 대통령의 오판이 있다면 국회의장과 국회의원들은 모든 것을 걸고 이를 막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2차 계엄에 대한 국민적 공포도 커지자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인 김선호 차관은 “일각에서 제기된 ‘2차 계엄 정황’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2차 계엄 발령에 관한 요구가 있더라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이를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