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단체들이 총선 후 의료계의 공통된 목소리를 내겠다고 밝힌 가운데, 정부가 2천명 증원 축소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며 대화 여지를 넓혔다.
정부와 의사들 사이의 대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 내부에서는 ‘대화론’과 ‘강경책’을 두고 비상대책위원회와 차기 회장 사이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일부 의과대학이 비대면 중심으로 수업을 재개한 가운데 이날은 휴학계를 제출한 의대생이 추가로 발생하지 않았다.
◇ ‘열린자세’ 강조한 정부…”1년 유예는 검토 안해”
8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도 ‘열린 자세’를 강조하면서 의료계를 향해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 모두발언에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의료계와 대화하고 설득하겠다”며 “과학적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더 합리적이고 통일된 대안을 제시한다면 정부는 열린 자세로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조 장관은 “의대정원 2천명 증원은 과학적 연구에 근거해 꼼꼼히 검토하고,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통해 도출한 규모”라며 “정부의 의료개혁 의지는 확고하다. 의료개혁만이 보건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도 이날 브리핑에서 의료계 일각의 증원 축소 주장에 대해 “신입생 모집요강이 최종적으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물리적으로 변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학교별 배정을 (이미) 발표해서 되돌리면 또 다른 혼란이 예상된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임이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의대 증원은 대학별 준비 작업을 거친 후, 통상 5월 하순 공고되는 ‘2025학년도 대입전형 수시모집요강’에 최종적으로 반영되는데, 그 사이에라도 정원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여지를 둔 것이다.
정부는 의협에서 제기된 ‘의대 증원 1년 유예론’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은 이날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의협 비대위 김성근 언론홍보위원장은 KBS 라디오에 출연해 의대 증원을 1년 유예하자고 제안했었다.
박 차관은 의협이 총선 후 의대 교수, 전공의, 학생들과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중요한 의료계 단체들이 포함된 것으로, 대표성 있는 협의체 구성에서 진일보한 형태인 것으로 평가한다”며 “만나서 대화를 나눠 생산적인 토론을 통해 국민들이 어렵고 힘든 것을 해소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의료계 단일대오 예고했지만, 차기회장 반발…의협 ‘내홍’
정부가 이날 내놓은 발언들은 전날 의협이 정부와의 대화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한 반응이다.
의협 비상대책위원회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주 안에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 등과 함께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과 관련된 ‘합동 기자회견’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의협이 교수단체, 전공의, 의대생과 ‘공동대응 전선’을 꾸리면서 정부와의 소통도 일원화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강경파인 차기 의협 회장이 이런 움직임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내홍이 일고 있다.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이날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보낸 공문을 통해 임현택 차기 회장 당선인이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의협은 지난 2월 정부의 의대 증원이 발표된 후 비대위 체제로 전환했고, 현 비대위는 김택우 비대위원장이 이끌고 있다.
인수위는 공문에서 “의도와는 달리 비대위 운영과정에서 당선인의 뜻과 배치되는 의사결정과 대외 의견 표명이 여러 차례 이뤄졌고, 이로 인한 극심한 내외의 혼선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임 당선인은 연합뉴스에 “중요한 시기에 저와 합치된 의견이 나갈 줄 알았는데, 제 의사에 반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며 “일일이 열거하긴 어렵지만 비대위에서 의대 증원과 관련해 ‘1년 유예안’을 제안했다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당선인의 의사에 반하는 비대위의 의사결정 중 ‘중요한’ 사례로 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대전협 비대위원장의 만남 주선을 꼽기도 했다.
임 당선인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부를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은 2천명이 최소 규모라고 했다가,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천명이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고 했다. 총리는 2천명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하고, 복지부 장관은 2천명을 열린 자세로 논의할 수 있다고 했으나 복지부 차관은 2천명 (증원) 방침이 유효하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지금 무정부 상태인가요?”라고 질문하며 “정부가 근거에 입각한 합리적이고 통일된 대안 제시하면 논의 가능하니 대안부터 의협에 제시하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임 당선인이 비대위원장을 맡을 경우 의협 비대위가 예고한 의료계 단체의 합동 기자회견이 무산될 가능성도 있다.
그는 “(합동 기자회견은 당선인과) 합의된 게 아니었다”며 “일단 다 모아서 의협과의 협의 없이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이날 박 위원장이 합동 기자회견에 대해 동의한 적이 없다고 밝혀 무산 가능성을 키웠다.
박 비대위원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택우 비대위원장,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자신을 ‘내부의 적’이라고 겨냥한 듯한 임 당선인의 페이스북 발언을 담은 기사에 대해 “해당 기사는 유감입니다. 저는 언제든 대화 환영입니다.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라고 남겼다.
◇ 서울 권역응급의료센터 7곳 중 6곳 ‘진료 차질’…일부 의대 개학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지 8주차에 접어들면서 응급의료 현장이 한계에 직면했다.
서울시내 권역응급의료센터 대부분이 ‘진료 차질’을 빚으며 환자를 가려 받는 중이다. 응급실 의사들은 현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사직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중앙응급의료센터 종합상황판에 따르면 서울시내 권역응급의료센터 7곳 중 서울의료원을 제외한 6곳이 ‘진료 제한’ 메시지를 표출하고 있다.
전국 44곳 권역응급의료센터의 상황도 좋지 않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5일 기준 안과나 산부인과 등 진료 제한 메시지를 표출한 권역응급의료센터는 16곳에 달한다. 4일(15곳)보다 1곳 늘었다.
이런 가운데 대한응급의학의사회를 중심으로 꾸려진 응급의학과 비상대책위원회가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응급실 사직을 포함한 구체적 행동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고해 응급실의 혼란은 더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한편,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 장기화로 집단유급 위기가 커지면서 그동안 개강을 연기했던 일부 의대가 이날 수업을 재개했다.
경북대와 전북대 등 일부 대학은 더 이상 개강을 늦출 수 없다고 보고 이날 비대면으로 수업을 재개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브리핑에서 “오늘부로 수업을 운영하는 의대가 14개교로 늘어나 전체 의대의 35%가 수업을 진행하게 됐고, 다음 주인 15일부터는 17개 정도 대학이 추가로 수업을 정상화할 계획을 갖고 전력을 다해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