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가자지구 휴전을 성사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특히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의 핵심 조건으로 사우디가 요구한 상호 방위조약이 거의 완성단계까지 왔다며 이스라엘, 하마스 모두를 압박했다.
29일 AFP,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특별회의 참석차 이날 사우디 리야드를 찾은 블링컨 장관은 “미국과 사우디가 합의 측면에서 함께 진행해 온 작업이 잠재적으로 완료에 매우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를 진전시키려면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가자지구의 고요함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믿을만한 경로가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이살 빈 파르한 알사우드 외무장관도 관련 질문에 “아주, 아주 가까워졌다”며 “대부분의 작업이 마무리됐다. 팔레스타인 전선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에 대한 광범위한 윤곽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공을 들이는 외교정책 중 하나다.
사우디는 관계 정상화의 대가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수준의 상호방위 조약 체결과 민간 핵 개발을 위한 우라늄 농축 허용 등 지원을 미국에 요구해왔다.
지난해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해 가자지구 전쟁이 시작되면서 관련 논의가 한동안 중단됐는데 최근 논의가 재개되면서 진전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략 중단과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없이는 이스라엘과 수교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양국의 수교 논의 진전은 휴전에 미온적이었던 이스라엘을 겨냥한 압박 카드로 해석된다.
이날 리야드를 찾은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다음달 말까지는 일부 EU 회원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국제사회가 가자지구 휴전을 위해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데 공조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블링컨 장관은 동시에 하마스에도 휴전 합의에 응하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그는 “하마스가 받아 든 제안은 이스라엘로선 대단히 관대하다(extraordinarily generous)”고 말했다.
이어 “그들(하마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빠르게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나는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이제 6개월 이상 끌어온 유혈사태의 역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스라엘·사우디 수교 카드는 하마스에도 압박이 될 수 있다.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하마스는 서방에 적대적인 이란 외엔 의지할 세력이 없어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 사우디의 지지 철회는 아랍·이슬람권 대부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다.
하마스가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배경 중 하나가 이스라엘·사우디의 수교 협상이 급진전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올 만큼 이 사안은 중동의 판도를 바꿔 하마스의 입지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이런 안팎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미국은 이스라엘엔 더 많은 유럽 국가의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하마스엔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를 고리로 휴전을 동시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꿔 말하면 이스라엘엔 휴전에 합의하고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면 사우디와 수교해 대이란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성과급’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하마스엔 휴전 조건을 받아들이면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이라는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던진 셈이다.
외신들은 하마스가 26일 중재국인 이집트를 통해 이스라엘의 새 휴전협상안을 전달받은 뒤 이날 이집트 카이로로 협상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집트 정부는 이스라엘에도 대표단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집트의 사메 수크리 외무장관은 “이번 (휴전) 제안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의 입장을 고려하고 조정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제시한 협상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의 제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매체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인질-수감자 맞교환이 성사되면 10주간 휴전하면서 ‘지속 가능한 평온의 회복’을 위해 추가로 협상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 블링컨 장관이 중동을 찾은 건 이번이 7번째다.
이스라엘 방문도 앞둔 그는 민간인이 효과적으로 보호받는다는 확신을 주는 계획이 아직 없다”며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군 공격 방침에 반대한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